별거없는 목사의이중생활/책상뒤 은밀한 낙서

아버지의 귀천(歸天) II

프르딩딩 2025. 4. 6. 00:19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가족들은 일상으로 돌아왔다.어머니는 3일장내내 50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남편의 임종과 마지막 가는길을 바라보지 못했다는 원망을 자식들에게 쏟아 놓으셨다. 가족들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내가 어머니에게 해드릴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얼굴이 그 어떤 때보다 편안했음을 말씀드리는 것이 전부였다. 임종 당일 그저 아무일 없이 병원 진료를 보고 다시 돌아오겠노라 약속했던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마지막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와 우리 가족에게는 어디서 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지 모르는 급작스러운 일이 되버렸다.

장례를 지내는 동안 내가 해야만 했던 일들은 가족들의 슬픔을 위해서 내 슬픔은 잠시 뒤로 뭍어 두는 일이었다. 어금니를 악다물고 장례를 준비해야 했다. 슬픔에 잠겨 머뭇거리며 장례를 준비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장례식장을 예약하고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야만 했다 무엇을 생각하고 상의하며 결정해야할 겨를 없이 이성의 끈을 붙잡아야만 했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의 시간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견뎌야만 했다. 내가 제정신으로 있지 않으면 가족들이 무너지기에 형제들이 올라올때까지 그리고 어머니가 버틸수 있도록 버텨야 했다.

베란다 밖에서 본 풍경

 

모든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의 유골함은 오랬동안 따뜻했고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 만큼이나 무거웠다 그리고 어머니는 버스안에서 그런 아버지의 유골함 옆 자리를 지키셨고 따뜻한 온기의 유골함을 만지며 슬픔을 달래셨다, 함께 살아온 희노애락의 세월을 이해할 반려자가 떠났다는 현실이 노구의 몸을 이끌고 남은 생을 살아야만 하는 어머니에게는 이 시간이 가혹했으리라. 돌아가시기 전까지 정정하셨고 당당한 체구에 커다란 목소리 젊은 감성을 지니셨던 아버지가 작은 유골함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연신 "왜 거기에 들어가 있느냐" 며 우시면서 유골함을 계속 쓰다듬으셨다. 

아버지를 에덴 추모 공원에 모셔드리고 남겨진 가족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부재가 오는 공허한 시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게 없는데 나는 아빠 없는 자식이 됐다는 우울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악다물었던 어어금니에 힘을 빼고 소파에 앉아 좀 처럼 먹지 않았던 소주 한병을 부어 마셔도 가라 앉지 않는 슬픔에 고통스러웠고 마음껏 목놓아 울지 못했던 시간들을 되찾기에는 어머니의 슬픔을 먼저 배려해야만 했다.

그렇게 뒤척이다 쇼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현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보니 아버지가 큰 종이 봉투를 양손에 들고 오셔서는 바닥에 내려 놓으시고는 아이구야.!! 라고 큰 한숨을 쉬셨다, 너무 놀란 나는 아버지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고 아버지는 특유의 말투로 "뭐가 어떻게 된거긴... 엄마는 자냐? 깨우지 마라" 하시면서 옷에 뭍은 눈을 툭툭 털어내셨다. 계속 어떻게 된거냐고 묻는 나에게 아버지는 "아이고..야 나 뚝방길로 걸어왔다 야"  하시면 웃으시면서 한숨을 내쉬셨고 잠이 깬 나는 그 모든게 꿈이었음을 알게됐다.

그리고 커튼을 열고 창밖을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속에 나타난 아버지가 눈을 툭툭 털었던 그 눈들이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고 그 광경을 본 나는 이제 마음껏 아버지를 그리워 하며 눈물을 흘릴수 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내가 꿈속에서 만났던 아버지의 모습과 했던 말들을 이야기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평생을 가족들과 동생들을 위해 대가 없이 희생만 하고 살았던 아버지기에 뚝방길을 걸었다는 것은 그 고단했던 인생길을 걸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양손에 들려있던 무거운 종이 봉투는 삶의 무게를 이제서야 내려 놓은것 같다 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셨지만 이제 당신의 남편이 쉼을 얻었음을 믿을수 있게 되었다고 한편으로는 또 기뻐하셨다. 

그 이후로는 아직 아버지를 꿈속에서 만나는 일이 없다. 어머니께서 매정한 양반 어떻게 꿈속에서라도 한번을 안보여 주냐고 원망하실 때마다 나는 좋은 곳에 가셔서 살고 계셔서 그런것 같다고 농담 섞인 말투로 어머니를 위로한다.아버지와 나는 많은 다툼으로 살아왔다 아버지로 부터 인정 받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고 때로는 아버지를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 보려고 발버둥 친적도 있었다, 더 이상 어떻게 할수 없을때는 힘 잃어 가는 노인네를 모질게 대하기도 했었고 허리 굽은 아내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들어가는 뒷 모습을 보면서 차 안에서 목 놓아 운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였다.

나에게는 그런 애정이 쌓인 아버지였는데 뭐가 그곳이 그렇게 좋으신지 요즘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 집에 갈때 마다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가족들 사진첩에 웃고 계시는 아버지를 어루 만지며 한마디씩 한다. "아부지 보고 싶어요!!", 청바지를 즐겨 입으셨고 올드 팝송을 즐겨 들으셨던 아버지, 때로는 허황된 인생을 사셔서 가족들의 마음을 힘들게도 하셨지만 가족을 지켜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뚫고 나가야 하는 고단함을 짊어지셨어야 했던 분. 내가 천국 갈때 까지 평생 기억하고 가야할 우리 아빠.. 

14년전 혜화동에서 아버지 몰래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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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보고 싶어요...!!  엄마 걱정 마시고 거기서 행복하게 놀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