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없는 목사의이중생활/책상뒤 은밀한 낙서

목사는 맞는데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프르딩딩 2024. 7. 9. 01:44

어느 순간 부터 이해를 바라는 수고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는 나 자신을 누군가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살았던것 같은데 지금은 굳이 오해할 일이라면 그냥 오해 하게 놔둔다. 내가 했던 나름의 최선이 누군가에게 만족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그 이상은 내가 어떻게 할수 있는 영역은 아니기에 그 결과가 오해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그 다음에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은 그냥 놔두일이 되었다.

오늘을 사는 것이 내일을 위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니기에 오늘 내가 할수 있고 쓸수 있는 모든 것을 소모하고 내일이라는 미래를 기대하고 살기로 마음 먹었었다. 무엇을 이루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은 내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에 대한 소모였음을 알았을때 성경의 전도서 기자가 말했던 것 처럼 살아보니 인간이 추구했던 모든 것들이 헛됨이었음이 무엇인지 불혹의 중반의 나이를 넘어서야 깨달음의 지혜로 다가오게 된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평범한 오늘에 감사하고 자족하며 사는 기쁨임을 오늘 내게  주어진 현실에서 맛보며 살아간다, 이것이 은혜다 싶다. 

하지만 살아왔던 날들에 습관이 있기에 어느 순간 내가 손에 쥐지 못했던 막연한 무엇가를 그리워 하며 또다시 불나방 처럼 뛰어들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어차피 일어날 일들은 굳이 내가 애쓰지 않아도 일어날 일들이기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 오늘 움츠리고 사는 일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홍대 카페에서

 

인생의 가장 큰 축복도 가장 큰 저주도 만남이라 생각한다..누구를 만나느냐가 삶에서 가장 큰 도전이고 갈림길이 되듯이  그러기에 삶에서 만남은 언제나 큰 일이다. 범사(평범)의 일상속에 우연으로 가장된 인연의 섭리로 인해 은혜를 경험하며산다. 자신의 삶에 소홀함이 없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나눌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는 가장 큰 축복이다. 신앙은 현실에서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미덕( 美德 )의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무례히 행하지 않고, 겸손하며 존중하는 삶의 태도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자신이 깨달은 바 대로 세상(사람)을 대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네오형님에게서 세상(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성품을 배운다, 그것이 형님이 배우고 깨달은 지혜로 부터 오는 세상을 향한 미덕( 美德 ) 이라 믿는다. 각자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진리의 가르침대로 배운바 깨달음을 가지고 자신의 현실에서 살아내려는 노력의 결과는 결국 성품으로 발현되는 것임을 형님을 통해 나의 깨달음도 확고해 진다.

홍대카페에서 네오형님과

 

홍대카페에서 네오형님과

 

버틀런드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을 탐독 했을때 사람들은 나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확고한 믿음이 없는것 아니냐는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에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것은 누군가의 생각을 듣고 대화하지 않으려는 이들에 대해서 굳이 내 믿음에 대해서 증명하려는 노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내가 러셀의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신앙과 믿음이 러셀이 말한 텍스트 자체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무례한 판단이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눠야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했었다. 나는 여전히 기독교인이 아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지만, 성경을 통해 내가 배우고 깨달은 바대로 살아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뿐 기독교라는 수식어가 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본적 없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를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이 정답 처럼 알고 있던 종교인에 대한 정의가 나로 인해서 무너지는게 용납되지 않을수 있겠다는 이해의 폭도 조금은 생겼다.언젠가는 내가 왜 기독교인이 아닌지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질문해 주는 사람이 생기기를 조급하지 않게 기도하며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쩌면 네오형님을 만났으니 이미 바램은 이루어 진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