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의미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서 아기 이름을 '하율'로 출생신고를 하고 특별히 한자를 정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율법에 주어진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마음으로 한글 이름을 그대로 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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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기 이름을 물어볼때 마다 반응은 일반적으로 두가지 정도로 나타나는데 첫번째는 어감이 이쁘다는 말과 함께 두번째는 아이의 삶을 율법으로 억압하려고 하느냐에 대한 농담섞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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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야기를 들을때마다 내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두번째 반응이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동일한 인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어쩌서 율법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많은 이들로 하여금 무자비한 억압의 논지로 인식하고 있는지 난 지금도 이해할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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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 전체를 압축하면 율법(10계명)으로 압축되고, 다시 율법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이라는 것이 모두가 동의될수 있는 일반적인 논지라면, 율법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에 대한 태도와 가치관들을 지금 이 세상 일상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아내야 함을 명백하게 도전하고 있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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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율법이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삶으로 담아야할 아름다운 가치관 이라는 점을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루터 역시 종교개혁 이후에 타락한 교회와 목사들그리고 성도들의 신앙의 개혁을 위해서 십계명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대요리 문답을 통해서 명백히 가르치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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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율법의 말씀들이 지금 이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는 무자비한 인식의 대상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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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여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기울어진 가르침에 대한 부작용 아닐까 싶다. 인간은 비록 죄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의롭다 칭함받았기에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는 덮어지고 새롭게 거듭난 삶을 살게된 존재 라는 완전하지 못한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이 율법의 정체성을 완전히 희석 시켜 버린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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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가 하나님의 '공의'를 덮을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에게 은혜 됨이라 말할수 있는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날선 진노 앞에 하나님 스스로 기꺼이 죄인들의 중보자가 되셨음이 은혜인 것이지,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뛰어넘는 사건이 주는 만족이 아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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